제 3632 호
2025년
06월
22일

제목 : ‘의심과 불신을 넘어 믿음으로!’
본문 : 마가복음 9:17~24
서론 :
혹시 번지점프를 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발판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은 안전장비와 로프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심이나 불신이 강해서 성경의 진리를 좀처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군가 의심과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의심은 방해물을 보지만 믿음은 길을 봅니다.
-의심은 한 걸음을 두려워하지만 믿음은 높이 날아오릅니다.
-의심은 “누가 믿지?”하고 묻지만 믿음은 “내가!”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의심, 불신, 그리고 믿음 이 세 가지 것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신가요?
히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의심과 불신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또 성경을 향해서 아니면 어떤 무엇인가를 향하여 의심과 불신을 갖고 있다면 그 문제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마음에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
1.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차원에서 의심이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심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성경의 원문인 헬라어에서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의심이란 헬라어 원어에는 ‘디아크리노’와 ‘디스타죠’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전자는 ‘분별하다’, ‘판단하다’라는 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21:21 ; 약 1:6).
예수님은 마 21:21에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이런 일을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부정적 측면에서 ‘망설이다’, ‘주저하다’의 뜻으로 진리를 거부하거나 도전하는 생각과 태도를 말할 때 사용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디스타죠’는 하나님의 존재나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으려는 전제에서 시작된 의심을 말합니다. ‘디스타죠’의 예를 들면, 마 14:31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라고 그를 책망하심으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유사한 의구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의구심은 진리를 분명히 알기 위한 긍정적 접근 과정에서의 즉, 분별과 구별적인 차원에서의 의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이 다 나쁘고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의구심은 성장과 성숙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확실히 믿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확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기 위해 의구심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신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불신하고 계신가요? 마음과 생각 속의 의심들 또는 의구심을 모두 내버리고 단순한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2. 불신은 무엇입니까?
의심이나 불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불신은 의심보다도 더 강한 의지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불신의 대상은 때에 따라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역사적 사건과 사실과 진리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이란 어떤 특정한 선입관을 갖고 믿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소통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명백한 진리와 진실을 부정하면 매우 불합리하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의심과 불신을 버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말씀하신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과 확신이 될 것입니다. 의심이 열린 마음을 가진 질문이라면 불신은 닫힌 마음의 거부를 말합니다.
의심은 무엇이 참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고 혼란한 상태라면 불신은 분명한 증거나 진리를 거부하고 거절하려는 태도입니다. 의심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은 고집과 완고한 마음의 상태로 남아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으로부터 단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6:9에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나아가 법을 위반한 행위들은 죄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 도둑질, 사기, 우상숭배의 행위들은 당연히 죄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을 불신하는 것 자체를 성경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시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로 믿지 않는 불신이 곧, 죄인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도마와 같이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막 9:24 ; 히 11:3)
성경에서 믿음의 장으로 일컫는 히 1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 세상 만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본문인 막 9:24의 말씀을 보면 병든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아리송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지 아니함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이 사람의 고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병든 아들을 낫게 하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이 사람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병든 자신의 아들을 능히 치료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싶은데 자신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의심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도록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 장면의 모습은 비록 병든 아들의 아버지가 지닌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도 정직하고 간절한 도움을 요청한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마음을 보시고 그의 아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옵소서~~” 와 같은 고백은 성숙한 믿음은 아니지만 진짜 믿음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이 아버지의 간절한 믿음을 구한 결과로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치유시켜 주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고 또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말합니다. 롬 10:17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롬 10:9~11).
혹시 번지점프를 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발판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은 안전장비와 로프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심이나 불신이 강해서 성경의 진리를 좀처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군가 의심과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의심은 방해물을 보지만 믿음은 길을 봅니다.
-의심은 한 걸음을 두려워하지만 믿음은 높이 날아오릅니다.
-의심은 “누가 믿지?”하고 묻지만 믿음은 “내가!”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의심, 불신, 그리고 믿음 이 세 가지 것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신가요?
히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의심과 불신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또 성경을 향해서 아니면 어떤 무엇인가를 향하여 의심과 불신을 갖고 있다면 그 문제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마음에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
1.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차원에서 의심이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심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성경의 원문인 헬라어에서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의심이란 헬라어 원어에는 ‘디아크리노’와 ‘디스타죠’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전자는 ‘분별하다’, ‘판단하다’라는 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21:21 ; 약 1:6).
예수님은 마 21:21에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이런 일을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부정적 측면에서 ‘망설이다’, ‘주저하다’의 뜻으로 진리를 거부하거나 도전하는 생각과 태도를 말할 때 사용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디스타죠’는 하나님의 존재나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으려는 전제에서 시작된 의심을 말합니다. ‘디스타죠’의 예를 들면, 마 14:31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라고 그를 책망하심으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유사한 의구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의구심은 진리를 분명히 알기 위한 긍정적 접근 과정에서의 즉, 분별과 구별적인 차원에서의 의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이 다 나쁘고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의구심은 성장과 성숙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확실히 믿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확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기 위해 의구심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신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불신하고 계신가요? 마음과 생각 속의 의심들 또는 의구심을 모두 내버리고 단순한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2. 불신은 무엇입니까?
의심이나 불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불신은 의심보다도 더 강한 의지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불신의 대상은 때에 따라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역사적 사건과 사실과 진리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이란 어떤 특정한 선입관을 갖고 믿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소통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명백한 진리와 진실을 부정하면 매우 불합리하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의심과 불신을 버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말씀하신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과 확신이 될 것입니다. 의심이 열린 마음을 가진 질문이라면 불신은 닫힌 마음의 거부를 말합니다.
의심은 무엇이 참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고 혼란한 상태라면 불신은 분명한 증거나 진리를 거부하고 거절하려는 태도입니다. 의심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은 고집과 완고한 마음의 상태로 남아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으로부터 단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6:9에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나아가 법을 위반한 행위들은 죄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 도둑질, 사기, 우상숭배의 행위들은 당연히 죄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을 불신하는 것 자체를 성경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시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로 믿지 않는 불신이 곧, 죄인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도마와 같이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막 9:24 ; 히 11:3)
성경에서 믿음의 장으로 일컫는 히 1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 세상 만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본문인 막 9:24의 말씀을 보면 병든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아리송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지 아니함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이 사람의 고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병든 아들을 낫게 하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이 사람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병든 자신의 아들을 능히 치료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싶은데 자신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의심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도록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 장면의 모습은 비록 병든 아들의 아버지가 지닌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도 정직하고 간절한 도움을 요청한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마음을 보시고 그의 아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옵소서~~” 와 같은 고백은 성숙한 믿음은 아니지만 진짜 믿음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이 아버지의 간절한 믿음을 구한 결과로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치유시켜 주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고 또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말합니다. 롬 10:17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롬 10:9~11).
결론:
아직 구원받지 않은 분, 성경의 진리를 믿지 못하시는 분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때 하나님은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아야 될 분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성경의 약속의 모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죄 용서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며 그리고 큰 상을 받으려면 더 큰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고백입니다.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셔서 세상을 이겨낼 큰 믿음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며 동시에 축복의 통로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않은 분, 성경의 진리를 믿지 못하시는 분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때 하나님은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아야 될 분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성경의 약속의 모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죄 용서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며 그리고 큰 상을 받으려면 더 큰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고백입니다.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셔서 세상을 이겨낼 큰 믿음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며 동시에 축복의 통로입니다.

◎ 교회와 사역을 위하여
- 구령목표 300명, 성인 출석목표 300명이 달성되도록
- 교회에 활발한 복음 전파와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 담임목사님의 영육간의 강건함과 성령 충만함으로 사역 감당하도록
- 사역자, 집사님, 직원들이 맡겨진 사역과 섬김을 잘 감당하도록
- 주일학교, 찬양대, 바나바팀 등 각 부서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 707 비전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 선교사님들과 선교 사역지를 위하여
- 본교회 파송 선교사 : 김연규(미얀마)
- 본교회 협동 선교사 : 박정선(대만), 여병무/김종옥(몽골), 임철순(가나), 김성준(멕시코), 한수현(네팔), 김성일(N국), 한대기(미얀마), 이지성(인도네시아)
- 한국성서침례신학교와 본교회 신학생 : 이희천, 박준, 권도희
◎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 성경 원리에 반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 나라의 위정자들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이끌어 가도록
◎ 구원을 위하여
- 강양원, 강일심, 고구호, 구미옥, 김강중, 김건중, 김문희, 김수열, 김수정, 김승철, 김예은, 김용성, 김용승, 김용옥, 김용훈, 김일순, 김재화, 김정남, 김정원, 김채연, 김현수, 김형복, 노형석, 문명온, 박미솔, 박선옥, 박세종, 박영숙, 박종옥, 박혁균,
박희원, 배옥순, 설영덕, 손영필, 손유진, 손희남, 손희준, 송윤근, 송 철, 송해권, 양선규, 여례연, 우옥자, 유수진, 유양선,
유정희, 유흥종, 이가은, 이금남, 이용진, 이현숙, 이홍식, 임보경, 임상근, 임향림, 임향선, 임향옥, 전원례, 조순심, 조영란,
지윤선, 차 훈, 최종균, 최종석, 한형진, 황한나
◎ 성도들과 각 가정을 위하여
- 최근에 구원받은 분들의 믿음이 잘 성장하도록
- 성도들의 생업과 사업이 번창하도록
◎ 건강 회복을 위하여
- 경향표, 곽세인, 권기덕, 권중희, 김명화, 김민경, 김인환, 김택구, 민종섭, 박진호, 배준서, 서만철, 서장석, 송명자,
신자삼, 어근영, 오녹순, 이금호, 이만형, 이성혜, 이봉덕, 이지희, 이혜자, 이희천, 조지욱, 차형훈, 하봉순, 홍제범
◎ 임산부를 위하여 - 이지형
◎ 군 복무 중인 형제들을 위하여 - 임형빈, 이은찬, 김원우
◎ 해외 성도들을 위하여
- 김도현 가정, 최주열 가정, 김세민, 김세영, 김시언, 김예준, 김윤이, 김경애, 백진우, 황세연, 황세희
◎ 교회 헌금 계좌 안내 – 국민은행 806201-04-004362 성서침례교회
- 구령목표 300명, 성인 출석목표 300명이 달성되도록
- 교회에 활발한 복음 전파와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 담임목사님의 영육간의 강건함과 성령 충만함으로 사역 감당하도록
- 사역자, 집사님, 직원들이 맡겨진 사역과 섬김을 잘 감당하도록
- 주일학교, 찬양대, 바나바팀 등 각 부서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 707 비전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 선교사님들과 선교 사역지를 위하여
- 본교회 파송 선교사 : 김연규(미얀마)
- 본교회 협동 선교사 : 박정선(대만), 여병무/김종옥(몽골), 임철순(가나), 김성준(멕시코), 한수현(네팔), 김성일(N국), 한대기(미얀마), 이지성(인도네시아)
- 한국성서침례신학교와 본교회 신학생 : 이희천, 박준, 권도희
◎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 성경 원리에 반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 나라의 위정자들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이끌어 가도록
◎ 구원을 위하여
- 강양원, 강일심, 고구호, 구미옥, 김강중, 김건중, 김문희, 김수열, 김수정, 김승철, 김예은, 김용성, 김용승, 김용옥, 김용훈, 김일순, 김재화, 김정남, 김정원, 김채연, 김현수, 김형복, 노형석, 문명온, 박미솔, 박선옥, 박세종, 박영숙, 박종옥, 박혁균,
박희원, 배옥순, 설영덕, 손영필, 손유진, 손희남, 손희준, 송윤근, 송 철, 송해권, 양선규, 여례연, 우옥자, 유수진, 유양선,
유정희, 유흥종, 이가은, 이금남, 이용진, 이현숙, 이홍식, 임보경, 임상근, 임향림, 임향선, 임향옥, 전원례, 조순심, 조영란,
지윤선, 차 훈, 최종균, 최종석, 한형진, 황한나
◎ 성도들과 각 가정을 위하여
- 최근에 구원받은 분들의 믿음이 잘 성장하도록
- 성도들의 생업과 사업이 번창하도록
◎ 건강 회복을 위하여
- 경향표, 곽세인, 권기덕, 권중희, 김명화, 김민경, 김인환, 김택구, 민종섭, 박진호, 배준서, 서만철, 서장석, 송명자,
신자삼, 어근영, 오녹순, 이금호, 이만형, 이성혜, 이봉덕, 이지희, 이혜자, 이희천, 조지욱, 차형훈, 하봉순, 홍제범
◎ 임산부를 위하여 - 이지형
◎ 군 복무 중인 형제들을 위하여 - 임형빈, 이은찬, 김원우
◎ 해외 성도들을 위하여
- 김도현 가정, 최주열 가정, 김세민, 김세영, 김시언, 김예준, 김윤이, 김경애, 백진우, 황세연, 황세희
◎ 교회 헌금 계좌 안내 – 국민은행 806201-04-004362 성서침례교회

◉ 2025년 영혼 구령 (현재까지 결신자 : 115명)
- 결신자 : 10명
◉ ‘133차 임시 성도 총회’
- 오늘 오후 예배 후에는 제133차 임시 성도 총회가 있습니다.
- 내용 : 재개발 대응관련 (자세한 안건은 공고문 참조)
◉ ‘침례식 / 주의만찬’
- 일시 : 6월 29일(일) 오후 예배 시
침례받기 원하는 성도께서는 사역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6월 28일(토) 오후 2시에는 ‘빛과 소금’ 전도활동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참여 바랍니다.
◉ ‘성경퀴즈 / 암송대회’
- 일시 : 7월 6일(일) 오후 예배시
- 퀴즈 범위 : 사무엘상
- 암송 범위 : 요한복음
- 결신자 : 10명
◉ ‘133차 임시 성도 총회’
- 오늘 오후 예배 후에는 제133차 임시 성도 총회가 있습니다.
- 내용 : 재개발 대응관련 (자세한 안건은 공고문 참조)
◉ ‘침례식 / 주의만찬’
- 일시 : 6월 29일(일) 오후 예배 시
침례받기 원하는 성도께서는 사역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6월 28일(토) 오후 2시에는 ‘빛과 소금’ 전도활동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참여 바랍니다.
◉ ‘성경퀴즈 / 암송대회’
- 일시 : 7월 6일(일) 오후 예배시
- 퀴즈 범위 : 사무엘상
- 암송 범위 : 요한복음
◉ 식당청소 | ◉ 안내 | |||||
6월 | 7월 | 8월 | 6월 | 7월 | 8월 | |
청년부 | 생명나무 | 종려회 | 유니게회 | 루디아회 | 룻회 |
※ 2025. 6월 ‘빛 가운데 교제’ 질문
1. 언제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
2.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요?
3. 요즘 당신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색깔은 무슨 색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언제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
2.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요?
3. 요즘 당신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색깔은 무슨 색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06/23 시편 70~76장
- 06/24 시편 77~81장
- 06/25 시편 82~88장
- 06/26 시편 89~95장
- 06/27 시편 96~103장
- 06/28 시편 104~106장
- 06/29 시편 107~110장

예배구분 | 제목 | 본문 | 설교자 |
---|---|---|---|
주일 오전 예배 | 의심과 불신을 넘어 믿음으로! | 마가복음 9:17~24 | 이충세 목사 |
주일 오후 예배 | 복음 전도의 문을 열어주소서! | 골로새서 4:2~6 | 김정민 목사 |
수요 저녁 예배 | 사무엘상 강해(28)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한 다윗의 리더쉽 | 사무엘상 24:1~22 | 이충세 목사 |
